정결한 여정, 부활의 약속
레위기 12:1~8, 15:25~30
요약
레위기의 정결 규례는 여성을 부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의 거룩한 구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규례의 예표로 오셔서, 부정을 정결로 바꾸시고 고통을 생명으로 이끄신다.
출산과 유출의 고통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소망을 상징하며,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 생명으로 초대받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레위기 12장과 15장을 읽다 보면,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월경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인데, 왜 성경은 그것을 부정하다 말씀하실까?"
"출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인데, 왜 아이를 낳은 여인을 부정하다 하시는 걸까?"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여성이 거룩한 강단에 서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연 그런 뜻으로 말씀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서 성경을 단편적인 규정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펼치신 큰 이야기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여인의 몸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출산이라는 생명의 신비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로 가보면,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다가 생명을 잃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고통 속에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곧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이름을 바꿉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 다시 말해 '축복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출산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때로는 생명을 건 위태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 하나님은 생명을 심으십니다.
기쁨을, 미래를, 축복을 함께 담아내십니다.
출산은 단지 생물학적 행위가 아닙니다.
고통과 기쁨, 죽음과 생명이 맞닿아 있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이 말씀은 단순한 형벌의 선언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깨진 세상 속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이 얼마나 큰 수고와 헌신을 요구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도 바로 그 맥락 안에 있습니다.
성경이 출산한 여인을 '부정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더럽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다녀온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룩한 구별'의 언어입니다.
월경 또한 그렇습니다.
생명의 주기를 따라 흐르는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입니다.
때로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지 않은 빈자리의 흔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조용한 침묵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단지 의학적, 위생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연결된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여성을 낮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품고, 고통 속에서 기쁨을 낳는 여인을 가장 경이로운 존재로 바라보십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생애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시고, 존귀히 여기시는지를 함께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인의 유출에 대한 정결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레위기 15장의 유출에 대한 정결 규례를 통해 단순한 율법의 규칙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복음의 그림자를 함께 묵상해 보려 합니다.
레위기 15장은 단순한 위생법이 아닙니다.
이 규례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며,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정상적인 생리가 아닌, 비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유출 즉, 끊이지 않는 출혈에 대한 정결 규례를 다룹니다.
그 출혈은 단지 육체의 아픔을 넘어,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면은 복음서 속 한 여인의 이야기로 다시 등장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 모두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부정한 자로, 외로운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장면은 또 다른 고통의 이야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이야기와 함께 얽혀 있습니다.
12살 된 딸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그 길 위에서, 혈루병 여인이 조용히, 그러나 절실한 믿음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순간, 12년의 고통이 멈추고, 그녀의 몸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놀라운 장면입니다.
12년 동안 병을 앓던 여인, 그리고 12살 난 죽어가던 소녀. 모두 "딸"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모두,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이야기는 한 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분이시며, 그 구원은 믿음을 통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사건은,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의 말씀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 따르면, 유출이 있는 여인이 누구를 만지면 그 사람 또한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님의 거룩함이 그 여인에게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는 전염되지만,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도 전염됩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는 깨끗해집니다.
그분 안에 머무는 자는 구원을 입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를 이사야 6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때, 하늘의 스랍이 제단의 숯불을 가져와 그의 입술에 댑니다.
숯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의 입술이 정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부정을 대신 짊어지시고, 자신의 정결함과 의로움을 우리에게 옷 입히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분의 의로 덧입혀집니다.
그 마음이 정결해지고, 그 말이 정결해지고, 그 삶이 정결해집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지금 이 자리에, 말 못할 마음의 '유출'을 안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슬픔, 멈추지 않는 두려움, 반복되는 죄책감...
그 모든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옷자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해 손을 내미십시오.
믿음으로 조용히 손을 뻗으십시오.
말 없이도 괜찮습니다.
눈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딸아,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거룩함이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딸'로, '아들'로 다시 서게 됩니다.
둘째, 여인의 출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에서, 당신이 곧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통을 여인의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시며, 그 너머에 있는 기쁨, 곧 부활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 16:21~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난을 지나 생명에 이르는 복음의 길을 보여주는 선언입니다.
출산은 단지 생물학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리며 생명을 낳는 여인, 그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신 생명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 끝에 찾아오는 아기의 울음은, 무덤을 뚫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첫 울림입니다.
'하와'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 이름은 "생명"입니다.
하와는 단지 첫 여인이 아닙니다.
그녀는 생명의 통로였고, 장차 오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한 존재의 일부에서 또 다른 존재가 태어나는 이 장면은 죽음 같은 분리에서 생명이 다시 피어나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또 하나의 강력한 생명의 회복 장면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37장, 마른 뼈의 환상입니다.
메마른 들판에 흩어진 마른 뼈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생기가 불어오자, 그 뼈들이 움직이고, 살아나고,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이 환상은 단지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은 인류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부활 약속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아담의 뼈로 하와를 만드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고통스럽고 눈물 나는 출산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 생명을 낳기 위한 진통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우리, 곧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2:23)
온 세상이 산통 중에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 삶의 무게 앞에서 우리는 모두 고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이 고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왜냐하면, 그 고통의 끝에서 우리는 새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입으셨던 부활의 몸, 영광의 몸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산통 속에 있을 때, 우리 곁에는 늘 함께 탄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도 고통이 있습니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탄식이 있습니까?
혹시 그 고통이 너무 깊어, 기도할 말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있으십니까?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에도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말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만 숨을 쉬고 있는 그 순간조차,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생명의 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
출산의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울음은 부활의 소망을 예고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은 소멸로 끝나는 고통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고통입니다.
고통 속에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고통 뒤에,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날이 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고통 속에 있는 자를 부르시고, 삶의 무게에 눌린 자를 부르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는 단지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그림자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진 자는 깨끗해졌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 자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딸아,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부르심 앞에 오늘, 여러분의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 고통을 안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침묵 속에 있다면, 그 침묵 가운데 성령의 탄식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정결하게 하시며, 새 생명으로 일으키시고, 기쁨을 빼앗을 자 없는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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