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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설교

살아 있으나 죽은 자에게 임하신 은혜 (레 13:45~46)

by 말씀고 2025. 4. 9.

살아 있으나 죽은 자에게 임하신 은혜

레위기 13:45~46

 

요약

하나님은 나병을 통해 인간의 영적 실존, 즉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며, 정결함만이 생명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조건임을 강조하십니다.

나병 환자를 통한 열왕기하의 사건은 절망 속에서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을 여시고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고 단절된 자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십니다.

 

여러분,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안에 두 나무를 두셨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요, 하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 두 나무는 단지 식물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은혜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생명에 이르기 위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정결함'입니다.

시편 24편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로다."

하나님의 임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결한 자만이 설 수 있습니다.

 

반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부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런데 하와는 그 나무를 '보았고', '탐스러웠고', '먹었습니다.'

결국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게 됩니다.

정결은 생명으로 인도하고, 부정은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13장으로 오면, 이 부정의 절정을 보여주는 병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병입니다.

나병은 단지 피부병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죽음의 그림자'로, '부정'을 보여줍니다.

나병 환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나병 환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병 환자에 대해 이토록 엄격하신 것일까요?

그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나병 환자는 우리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병은 단순한 피부병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의학으로 말하는 한센병과도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의학 책이 아니라 신학적 진리를 말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죽음의 상태, 부정함의 극치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선고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고대인들은 나병을 '흙으로 돌아가는 병' 곧 '저주 받은 병'이라 불렀습니다.

썩어가는 살, 부패해가는 모습. 그것은 마치 시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이 나병에 걸립니다.

하나님 앞에 선 미리암은 심판을 받고, 아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걷는 시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나병 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13장 45~46절은 나병 환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입을 가리고, 끊임없이 외쳐야 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장례를 애도하는 모습입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이것은 단지 격리 조치가 아닙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외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이사야가 외쳤던 고백이 떠오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엡 2:1)

그렇습니다.

나병 환자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내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론 건강하고 멀쩡해 보여도, 내면은 썩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실존을 직면할 때, '부정하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에서부터 회복이 시작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나병을 고치심은 하늘 문을 여시는 사건입니다.

 

열왕기하 7장,

엘리사 시대에 사마리아 성은 아람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성 안에는 양식이 끊기고, 사람들은 절망했습니다.

아기를 잡아먹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생명나무로 나아갈 길이 완전히 끊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합니다.

"내일 이맘때면....양식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한 장관이 비웃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요?" (왕하 7:2)

그런데 바로 그다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일은 네 명의 나병환자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성 밖에 있었습니다.

성 안에도 소망이 없고, 성 밖에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 안 사람이나 네 명의 나병환자나 죽을 처지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 앉아서 죽을 바에야....나아가자."

그들은 아람 군대로 향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아람 군대가 '애굽의 병거 소리'를 듣고 도망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단어의 유사성입니다.

'나병환자들'(모쪼라임 מְצֹרָעִים ), '애굽사람'(미쯔라임 מִצְרַיִם ),
'하늘의 창'(창, 아룹보트 אֲרֻבּוֹת ), ‘네 명’(아르바아 אַרְבָּעָה )....

하나님은 나병환자들(모쪼라임)이 오는 소리를 애굽 사람들(미쯔라임)이 오는 소리로 듣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어 하나, 소리 하나까지도 사용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나병환자들이 먼저 복음을 경험합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양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성 안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합니다.

이방인, 버림받은 자, 부정한 자였지만, 그들(아르바아)을 통해 하늘의 창(아룹보트)이 열렸습니다.

하늘의 창을 여신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문을 다시 여시는 분입니다.

이를 나병환자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수많은 나병환자를 고치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닙니다.

죄로 죽은 인생을, 부정함으로 단절된 영혼을 살리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창을 여시고, 우리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내 인생도 사마리아 성처럼 막혀 있지는 않습니까?

안에서도 답이 없고, 밖에서도 소망이 없는 상황 속에 계시진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창을 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은 닫혀 있는 것 같아도, 그분은 얼마든지 창을 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죽은 곳에 생명을, 부정한 곳에 정결함을,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창은 지금도 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자를 통해서 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척 하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지도, 생명나무를 갈망하지도 않은 채, 그냥 앉아만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나아가라. 내가 하늘의 창을 여노라."

믿음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아가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살고자 하는 절실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십니다.

죽어가는 이 시대 가운데, 바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