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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설교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야기 (창세기 44:14-34)

by 말씀고 2025. 2. 11.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야기

창세기 44:14-34

요약
📖 예수님은 성경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시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구약의 예언을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 유다의 희생은 예수님의 대속을 예표하며, 우리는 죄와 사망의 운명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베냐민이 ‘고통의 아들’에서 ‘오른손의 아들’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이름과 정체성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곧 자신을 증언하는 말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39~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도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성경을 풀어 주시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기에 예루살렘에 함께 입성합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죠.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든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로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눅 24:25-27)
그리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설명하실 때 제자들의 마음이 불타오르던 그 경험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왜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을까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째, 유다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 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마지막으로 시험합니다.
이번에는 막내 동생 베냐민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점치는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이죠.
애굽에서 신과 관련된 물건을 도둑질하는 행위는 단순한 범죄가 아닙니다. 신성 모독죄로 간주합니다.
그 결과 범인은 종으로 팔리거나 강제 노역에 처합니다.
심지어 신성한 물건을 훔친 자는 신에게 바쳐진다는 개념이 있으므로, 사형을 당하거나 신전 노예로 평생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상징이 등장합니다.
고대 애굽에서 뱀(코브라)은 바로의 왕권을 나타내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바로의 왕관에도 코브라 형상이 새겨져 있죠.
그런데 성경에서 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사탄을 상징합니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냐민이 사탄의 종이 되거나 사탄에게 바쳐지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베냐민이 훔친 것으로 몰린 은잔은 점을 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점을 친다.'라는 히브리어가 '나하쉬(נָחַשׁ)'인데, 뱀을 뜻하는 히브리어도 '나하쉬(נָחָשׁ)'입니다.
단어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습니다.
'뱀'과 '점술'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창 44:9)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베냐민이 누명을 쓰고 절망에 빠졌을 때, 유다가 나섭니다.
"저 아이를 대신하여 내가 종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탁이 아닙니다.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우리가 한때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을 따라 살았고, 사탄의 종이었던 존재라고 말합니다. (엡 2:2)
그러나 다윗의 후손, 유다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위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를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깊이 새겨지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다시 뜨겁게 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베냐민은 우리의 모습을 예표 합니다.

 
베냐민의 출생에는 깊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 라헬은 그를 낳다가 산고로 죽습니다.
마지막 순간, 아들을 품에 안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부릅니다.
'베노니'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벤(בֵּן)'은 아들을 뜻하고, '오니(אוֹנִי)'는 고통, 슬픔을 의미합니다.
즉, '베노니'라는 고통의 아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들을 때, 무엇이 떠오릅니까?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죄를 지은 후, 고통과 슬픔의 저주를 받은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와는 죄로 인해 임신하는 고통과 해산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창 3:16)
라헬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슬픈 운명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지라." (창 3: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한마디로 말하면 '베노니', 곧 슬픔과 고통의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바꿉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부릅니다.
'베냐민'이라는 이름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벤(בֵּן)'은 아들, '야민(יָמִין)'은 '오른손'을 뜻합니다.
즉, '오른손의 아들', '축복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들을 때, 어떤 말씀이 떠오릅니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의 오른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구원의 손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나이다."
이 구절이 언제 등장하는 말씀입니까?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탄의 권세,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된 후 부른 노래입니다.
 
'베냐민'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원래 '베노니', 슬픔과 고통의 운명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베냐민', 축복의 자녀로 불러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붙드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를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우리를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바꿔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새겨지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다시 깨우기를 바랍니다.
 

결론 : 우리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베냐민을 대신하는 유다의 모습 속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슬픔과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른손의 아들, 축복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전히 '베노니'의 삶을 살겠습니까?
고통과 죄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새롭게 부르시는 '베냐민'의 이름을 붙들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새 이름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하십시오!
"주님, 이제 제 삶의 이름을 바꿔 주십시오!"
"이제 베노니로 살지 않고, 베냐민으로 살겠습니다!"
"이제 절망 속에서 헤매지 않고, 주님의 오른손을 붙들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뜨거움을 붙드시고, 이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얘야, 이제 너는 더 고통의 아들이 아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이 하나님의 음성 앞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결박당한 베냐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