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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설교

마른 뼈에 생기를 부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창세기 47:27-31)

by 말씀고 2025. 2. 14.

마른 뼈에 생기를 부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창세기 47장 27~31절

요약
📖 성경은 퍼즐처럼 연결된 이야기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 야곱과 요셉의 유골 이송은 단순한 장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부활의 소망을 상징합니다.
✝️ 하나님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회복과 생명의 기회로 삼으시며, 예수님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확증하십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퍼즐 한 조각만으로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지만, 하나둘씩 조각을 맞춰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큰 그림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사건과 인물의 이야기들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지만, 결국 하나의 분명한 그림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 다른 비유로, 성경은 '포토 모자이크'와 같습니다.
포토 모자이크는 작은 사진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이루는 예술 작품입니다.
이 기법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로버트 실버스(Robert Silvers)라는 아티스트입니다.
그의 작품 중 '살아계신 주(Living Jesus)'라는 모자이크 작품이 있습니다.
곰, 고양이, 집, 강 등 다양한 사진들이 모여 있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사진들이 모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얼굴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작품인 '그리스도 II(Christ II)'는 성경 사본 조각들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예수님의 얼굴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는 성경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에덴동산 이야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 출애굽 사건, 에스겔과 다니엘의 예언.
이 모든 이야기를 연결해 보면 결국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센 땅에 거하던 야곱, 즉 이스라엘이 임종을 앞두고 요셉을 불러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장면입니다.
그의 유언은 단순해 보입니다.
"내가 죽거든 조상의 묘지에 장사해 다오."
이는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닙니다.
이 요청 뒤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막벨라 굴'에 묻히겠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의 모자이크 속에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이라는 퍼즐 조각을 함께 맞춰 보려고 합니다.
 

첫째,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이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한 민족을 대표하는 이름, 이스라엘이라 불립니다.
창세기 50장에서 그는 결국 조상의 묘실인 막벨라 굴로 돌아가 장사됩니다.
이는 단순한 장례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것이라는 예언적 사건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유골을 조상의 묘실로 옮겨달라고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기억하며, 그 땅에서 이루어질 회복을 바라보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 13장 19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으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라."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유골을 막벨라 굴로 옮기는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의 유골이 가나안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역시 언젠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과 닮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꿈 해몽을 통해 총리가 됩니다.
마치 요셉이 애굽에서 꿈을 해석하여 총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도 요셉처럼 웅덩이에 던져집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버려져 구덩이에 던져졌던 것처럼,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퍼즐 조각과 같습니다.
 
다니엘과 연결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에스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한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한데, 하나님께서 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 뼈들이 살아나 군대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닙니다.
죽은 것 같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출애굽 사건과도 연결됩니다.
마치 야곱과 요셉이 유골을 들고 가나안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스라엘도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회복시키신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메마르고, 포로처럼 갇힌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야곱이 조상의 땅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의 시선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둘째, 이 이야기는 부활의 소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조상의 묘실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이 요청 속에는 부활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앞서 '막벨라 굴'이 '에덴동산'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참고: 이 부분을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여러분의 고센은 어디입니까? (창 46:1~7)" 와 "막벨라 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소망으로 (창23:1-20)" 설교문을 참고해 주세요.]

'막벨라 굴'은 한 쌍의 벌거벗은 남녀, 즉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담 אָדָם'이라는 이름은 '흙'이라는 뜻을 가진 '아다마 אֲדָמָה'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흙으로 빚어 만드셨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십니다.
돕는 배필, 곧 하와는 단순히 아담의 동반자가 아닙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에제르 크네그도 עֵזֶר כְּנֶגְדּוֹ'는 '옆에서 돕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며, 특히 '에제르 עֵזֶר'는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인간(아담 אָדָם)'은 옆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떠나 혼자일 때는 좋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결국 썩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와 חַוָּה'를 만드셔서 아담에게로 인도하십니다.
'하와'의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와는 히브리어 '하야 חָי'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하야'는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는데, 하와는 뼈로 만드셨을까?"
성경은 사람을 표현할 때 '골육'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뼈는 남습니다.
야곱이 죽어 살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뼈는 에덴을 상징하는 막벨라 굴로 옮겨집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400년이 지나도 그의 뼈는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뼈에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흙에서 생명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죽은 뼈에도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와의 이름 자체가 '생명(하야 חָי)'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 11:25-26)
이 말씀을 하신 장면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무엇과 연결될까요?
바로 하와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생명'은 곧 '하와 חַוָּ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하와의 존재는 부활의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하와'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죽었던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도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닙니다.
그 환상 속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장면은, 부활의 소망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단 12:2)
 
이제 다시 야곱의 유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야곱은 단순히 조상의 묘실에 묻히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뼈를 막벨라 굴에 매장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일까요?
그의 뼈를 붙드시는 하나님, 죽음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아담에게서 우리는 죄로 인해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연약함을 봅니다.
그러나 하와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약속과 부활의 소망을 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인생의 무게에 눌려 절망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뼈를 붙드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처럼, 요셉처럼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부활의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야곱은 죽어도 뼈를 약속의 땅에 두고자 했습니다.
요셉도 뼈를 남겼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뼈에도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은 흙으로 돌아갔지만, 하와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마른 뼈가 살아나듯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죽음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서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오늘, 다시 한 번 부활의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부활의 소망은 죽음 이후의 소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보듯 이 땅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수저 인생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죽은 뼈 위에 생기를 부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나는 생명을 붙잡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소망으로 승리하십시오!

요셉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는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