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 성전
창세기 28:10-22
야곱은 고향을 떠나 길을 걷던 중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놀라운 꿈을 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보이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깨어난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 장소의 이름은 원래 "루스"지만,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전이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단순히 땅에 지어진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곳이요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사람이 사는 땅이 겹치는 공간입니다.
성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 (사 66:1, 마 5:34-35)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땅에도 발을 딛고 계시는 곳, 그곳이 성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덴동산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에덴은 단순한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거하시던 성전과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성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십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하늘과 땅이 겹쳐집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100% 사람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전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벧엘의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전은 이제 건물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 거할 성소를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지으라." (출애굽기 25:8)
성막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입니다.
성막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쉬칸"인데, 이 단어는 "샤칸", 즉 "거하다"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장소,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리고 이 "샤칸"에서 나온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쉐키나",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이 단어가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지만, 랍비 문헌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미합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출애굽기 40장 3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영광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납니다.
성막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이 후에는 성전으로 이어집니다.
성막은 이동식이지만, 성전은 예루살렘에 고정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성전은 타락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예수님은 단순히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성전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오순절날,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막이나 성전이라는 건물에 임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납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합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제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신 저와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 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고린도전서 6:19)
우리의 본질은 루스와 같습니다.
"루스"는 "아몬드나무"를 뜻하지만, 그 어원은 "비틀어지다", "구부러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흐의 그림 속 구부러진 아몬드나무 가지처럼, 우리의 인생도 죄로 인해 휘어지고 비틀어진 모습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본", 곧 "죄"라는 단어 역시 비틀어지다, 구부러지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물론 어원이 되는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유사합니다.
그러나 루스가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의 삶도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됩니다.
성령님을 모신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령님을 모셨다는 것은 단순히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리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모신 우리의 삶은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부활의 몸, 성전이 되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에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만에 다시 짓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 즉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부활의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단순한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겹치는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눅 24:42-43)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질 수 있습니다. (요 20:27)
부활하신 몸은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몸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홀연히 사라지시기도 하고, 홀연히 나타나시기도 하십니다. (눅 24:31, 요 20:19)
부활의 몸은 우리의 현재 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몸, 바울이 말한 "신령한 몸"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 그리고 성령님에 의해 완전히 변화된 몸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15:42-44)
빌립보서 3장에서는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빌 3:20-21)
또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몸의 속량"이라고 표현합니다. (롬 8:23)
부활의 몸은 땅의 흙에서 만들어졌지만 하늘의 영처럼 더 이상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 썩지않는 몸입니다.
하늘과 땅이 겹치는 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선언합니다.
"너희 몸이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신 지금의 몸뿐만 아니라, 장차 부활의 몸까지 포함한 말씀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됩니다.
성령님을 모신 지금의 우리 몸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여기고,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십시오
야곱이 루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 부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삶도 완전히 변화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시는 성전이 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주심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모신 우리의 몸은 단지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육체가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받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무엇을 향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우리의 삶이 끊임없는 기도로 채워질 때,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루스가 벧엘로 변한 것처럼, 죄와 연약함 속에 있던 우리의 삶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성전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의 성전답게 거룩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이며, 우리의 영원한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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