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레위기 16장 11-19절
요약
레위기 16장의 속죄일 의식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은혜와 보호를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의 중보를 믿고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레위기 16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덮고, 우리를 그분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시는지 깊이 묵상하려 합니다.
레위기 16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속죄일 규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오래된 제사의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복음의 그림자요, 은혜의 예표입니다.
본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지성소, 곧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기 전, 그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성막 뜰에서 타오르는 번제단에서 숯을 가져와 향로에 담고, 또 향기로운 향을 두 손 가득 떠서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향을 피워 지성소 안을 향기로운 연기로 가득 채웁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성경의 여러 깊은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천사 스랍이 제단에서 숯을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대며 정결케 한 사건이 생각납니다.
또한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말씀하신 것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마노아, 삼손의 아버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본 후에 "우리가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두려워했던 일,
또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장면들도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왜일까요?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향의 연기는 하나의 보호막과도 같습니다.
죄인인 대제사장이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죽지 않도록, 하나님은 향기로운 연기로 지성소를 가득 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식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은혜의 장치입니다.
이렇게 지성소를 향기로 채운 후,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속죄소 위에, 그리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먼저는 자신의 죄를 위해 수송아지의 피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염소의 피를 뿌립니다.
마지막으로는 그 피들을 가지고 성막 뜰의 제단에 나와 제단 뿔에 바르고, 그 위에 일곱 번 뿌립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정결 의식이요, 속죄 의식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과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예식을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피, 이 모든 향, 이 모든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완전한 속죄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구약의 깊은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떠한지,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어떤 은혜가 필요한지를,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첫째, 향을 피우며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모습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두려움과 떨림 속에 대제사장이 향로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 앞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그 자리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순간, 향이 자욱하게 피어오릅니다.
온몸을 감싸는 연기 속에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바로 이 장면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표합니다.
히브리서 9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예수님은 이 땅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지성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직접 나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진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호칭보다 '인자'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닌 '인자'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니엘서 7장에 나옵니다.
다니엘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를 봅니다.
그 보좌 위에는 '옛적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으로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나아옵니다.
놀라운 장면입니다.
하늘 보좌를 향해 구름에 싸여 나아가는 인자.
이 모습은 지성소에 향의 연기에 싸여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하늘 보좌 앞에 나아가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분은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향을 피운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듯,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은 그 비극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새로운 아담이 되셔서, 닫혔던 하나님께 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길이 되셨습니다.
지성소로 가는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우리를 위한 그 길을 당신의 생명으로 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늘 아버지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우리는 그 거룩한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저하지 말고, 멈추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셨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부끄러움을 덮고,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그 하늘 문이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은혜의 보좌 앞으로 걸어가십시오.
하늘 문은, 열려 있습니다.
둘째, 향을 피우며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모습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여러분,
지성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그곳은 생명과 심판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대제사장은 향로를 들고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 손에는 피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백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한 사람을 떠오르게 합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 순간, 모세는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32절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 얼마나 놀라운 중보입니까?
자기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백성을 용서해 달라는 이 기도는,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세도 결국 한 사람의 그림자입니다.
그는 진짜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대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중보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그 피를 가지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아버지여, 이 피를 보소서. 이 피가 저들의 죄값입니다. 이 피로 인해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로마서 8장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장 25절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어떻게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까요?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은 곧 예수님의 중보의 사역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주목해야 할 단어는 ‘탄식’입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
창세기 6장 6절을 보면, 노아 시대의 죄악을 보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탄식. 그 아버지의 탄식. 그 탄식이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넘어질 때마다, 무너질 때마다, 그 보좌 앞에서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죄책감에 묶여 스스로를 정죄하며 삽니까?
얼마나 자주 '내가 이래서 되겠나' 낙심하며 주저앉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은 단지 과거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살아계시며 중보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 우리가 무너질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조차,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더 이상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피로 덮으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기도의 자리로 다시 걸어가십시오.
그분의 중보를 믿고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의 탄식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붙잡으려는 사랑의 울음입니다.
오늘 이 사랑 앞에 마음을 열고, 그 중보의 사랑을 붙잡으십시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길이 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중보하고 계십니다.
하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지금, 그 열린 문 앞에 서십시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죄책감도, 실패도, 상처도 예수님의 피 앞에 놓으십시오.
그분 앞에 나오십시오.
기도로, 눈물로, 믿음으로 주님께 다시 돌아오십시오.
오늘, 하늘 보좌 앞에 예수님의 중보를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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