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으시는 은혜, 임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37:1~9
요약
속죄소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임하는 자리로, 죄가 피로 덮이고 용서받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소가 되셔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그 은혜의 보좌, 곧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브살렐이 언약궤를 만드는 장면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의 언약과 능력을 상징하는 성막 기물입니다.
이 언약궤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 하나님이 특별히 주목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소, 또 다른 말로 은혜의 보좌라고 불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지시하시면서 출애굽기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나겠다.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말하겠다." (출 25:2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기 위해, 그리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 언약궤를, 그 가운데 있는 속죄소를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요?
그 속죄소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자리,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그분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어디인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속죄소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자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1년에 단 하루, 온 백성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날이 있었습니다.
대속죄일입니다.
그날,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즉 언약궤가 놓인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립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피로 인해 하나님은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로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가려진다'는 말, 히브리어로 '카사 כָּסָה', 곧 '덮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속죄소, 히브리어로 '카포레트 כַּפֹּרֶת', 이 역시 '덮개'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덮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죄가 덮였기 때문입니다.
속죄소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용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그 은혜의 자리를 바라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소가 되십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의 대속죄일에는 해마다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피를 뿌렸습니다.
그 피는 백성의 죄를 덮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속죄, 영원한 해결은 아니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 3장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여기서 '화목제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 ἱλαστήριον'인데, 이 말은 구약 성경(70인역)에서 '속죄소'를 번역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지금 '예수님이 바로 그 속죄소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속죄소에 나아갔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피를 흘리신 속죄소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다른 중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이 우리의 속죄소, 우리의 구원, 우리의 참된 화목의 길이 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정죄가 아닌 용서를, 심판이 아닌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속죄소이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4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구약 시대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언약궤 앞에서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분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신 때도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죄 없이 임재는 없습니다.
회개 없이 능력은 없습니다.
언약궤는 단순한 ‘성물’이 아닙니다.
그곳은 속죄소입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리에, 회개한 심령 위에 임하십니다.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절)
이어 말합니다.
"내 죄를 여호와께 자복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5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 삶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기도가 식어버렸다면, 우리의 중심에서 십자가가 멀어진 것은 아닐까요?
시편 32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 앞에는 긍휼이 있고, 은혜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속죄소 위, 곧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자리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멀리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 앞에 나아오십시오.
오늘 그 은혜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다시 서십시오.
그 자리, 십자가 앞이 우리의 다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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