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져내신 하나님,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출애굽기 2:1~10
요약
출애굽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표하는 구원의 패턴이며,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와 바로의 딸은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모세를 바라보고 보호했으며, 이는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고통받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 구원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조용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집니다.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다름 아닌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예수님께서 곧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여기 '별세'라는 단어, 헬라어로 '엑소도스(ἔξοδος)'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죠? '출애굽(Exodus)'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패턴입니다.
출애굽 사건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출애굽 속에서 부활을 봅니다.
출애굽기를 읽을 때,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2장 1-10절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 사람을 준비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지, 그 이야기 속에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어떻게 드리워져 있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첫째, 모세의 두 어머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한 레위 여인이 임신을 하고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지금 애굽에는 끔찍한 법이 내려져 있습니다.
태어나는 히브리 남자아이는 무조건 나일 강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도 그 명령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달라집니다.
모세가 너무도 잘생겼습다.
그냥 외적인 의미의 '잘생겼다'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표현을 '토브'(טוֹב)라는 단어로 기록합니다.
"보시기에 좋았다."
이 표현, 어디서 들어보았습니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실 때 사용한 바로 그 표현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지금 자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이 아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석 달 동안 숨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결단을 합니다.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둡니다.
이때 성경이 사용한 단어가 중요합니다.
'갈대 상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테바'(תֵּבָה)입니다.
이 단어, 어디서 등장합니까?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지금 단순한 바구니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작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장면이 바뀝니다.
이번에는 애굽 왕궁의 한 장면입니다.
바로의 딸이 시녀들을 데리고 나일 강으로 내려옵니다.
목욕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 순간, 갈대 사이에서 무언가가 눈에 띕니다.
작은 상자가 떠 있습니다.
시녀를 시켜 가져오게 합니다.
상자를 열어봅니다.
그 안에서 아기가 울고 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칩니다.
순간, 그녀는 이 아기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이 말은 바로의 명령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아기들이 하나둘씩 나일 강에 던져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불쌍히 여깁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여기 '자비롭다'는 말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레헴'(רֶחֶם)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의 뜻은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은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레위의 딸,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또 한 사람은 바로의 딸, 이 여인 역시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같은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한 여인은 하나님의 눈으로 모세를 바라봅니다.
또 한 여인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세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의 손길을 통해 하나님은 모세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눈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둘째.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바로의 딸이 아기를 발견하고,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2:10)
히브리어로 '모세(מֹשֶׁה)'라는 이름은 '끌어내다, 건져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낼 자입니다.
이름 자체가 그의 사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수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יֵשׁוּעַ)',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끌어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두 분 다 '구원자'이십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이루고, 예수님은 새 출애굽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자적인 사건 속에 상징과 비유를 담아 두셨습니다.
'갈대 상자'라고 번역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테바(תֵּבָה)",
이 단어는 애굽어에서 온 말로 "상자" 또는 "관(棺)"을 의미합니다.
[참고: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노아의 방주, (창세기 6:13~22)" 설교를 참고하세요.]
또한, 나일강과 홍해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무덤, 즉 스올을 의미합니다.
즉,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는 장면은 단순한 구조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건짐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스올에서 끌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누가 지켜보고 있습니까?
미리암, 모세의 누이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는 계속해서 '보다'(ראה, 라아)라는 동사가 반복됩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아기를 보고 잘생겼음을 깨닫습니다.
모세의 누이가 멀리 서서 어떻게 될지 지켜봅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 사이에서 상자를 봅니다.
상자를 열어 모세를 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미리암이 지며 보는 행위에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본 사람들도 여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 살로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미리암과 마리아, 이 두 이름이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미리암(מִרְיָם)의 헬라식 발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미리암이 물에서 건져진 모세를 보고 증언한 것처럼, 마리아는 죽음에서 건져진 예수님을 보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너는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부활의 사건을 지켜본 여인들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언하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예수님의 구속 이야기를 우리는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결론 – 이제, 우리가 건져낼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건져낼 것입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바로의 딸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겼습니다.
미리암은 그 구원의 순간을 보고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나일강에 던져진 생명들이 있습니다.
절망 속에 떠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면할 것입니까?
아니면, 건져낼 것입니까?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
이제는 우리를 구원의 통로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건져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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