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에게 주시는 축복
에베소서 1장 1-2절
요약
📖 ‘성도’의 의미
성경에서 ‘성도’는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하늘의 천사들과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을 성도로 부르며,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도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기쁨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성경에서 가장 큰 기쁨과 축복으로 표현되며, 시편 16편은 주의 임재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모세와 한나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얼굴이 밝아지고 내면의 근심이 사라지는 변화를 겪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이 땅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
야곱과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은 단순한 감정적 체험을 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후 복음을 전하는 성도로 살았고, 감옥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때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우리 주변에서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평범한 이웃을 떠올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도들'이라는 표현은 그보다 훨씬 깊고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성도'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렸던 두 부류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들, 소위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시편 89편 5절은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들’을 '거룩한 자들'이라 칭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명령을 수행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일꾼, 동역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들은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시편 16편 3절에서는 이들을 '땅에 있는 성도들'이라는 표현을 써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인 영적 존재들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영적 존재(소위 천사)들은 거룩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이기에 성도들이라 불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기에 성도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에베소에 있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그들을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단순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인 여러분은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들, 천사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유대인들과 같은 언약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정체성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기쁘고 행복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중요한 목표를 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성취했을 때입니다.
이때 느끼는 기쁨은 참으로 깊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런 기쁨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진정한 기쁨, 영원한 기쁨은 언제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성도들인 천사들이 누리는 축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 것, 이것이 하늘의 성도들인 천사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이렇게 큰 행복일까요?
시편 16편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 것은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천국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하프를 치며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상상합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천국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갈망하던 모든 것이 최상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잠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고 갈망했던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그 기쁨을 하늘에 가서야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기쁨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을 때, 그의 얼굴은 빛이 납니다.
그 빛은 단순히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깊은 영적 만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한나입니다.
한나는 자녀를 갖지 못해 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한나의 얼굴에서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빛이 가득 찹니다.
얼굴에서 근심 빛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혹시 삶의 무게에 눌려 한나처럼 근심과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 임재의 그 기쁨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 '신령한 복'은 '영적인 복'인데, 영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말합니다.
'영적인 복'의 반대는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복'을 말합니다.
이 영적인 복을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통일(하나)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기쁨이 이 땅의 기쁨과 하나가 되는 것,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이 땅에서도 맛보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이 경험한 일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그 결과 그는 형의 복수심에 쫓겨 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광야를 떠돕니다.
고난스러운 인생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외로운 광야의 한복판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계단(사다리)을 보여주십니다.
그 계단을 통해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며,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이 약속은 단순히 두려움을 없애는데 그치지 않고 야곱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자신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새로운 경외감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그 경험이 단순히 감정적인 체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룩한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후, 그곳을 '벧엘'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바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의 얼굴을 주목해 보니 천사의 얼굴 같습니다. (행 6:15)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 천사들처럼 충만한 기쁨이 얼굴에 가득했다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 하나님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셨다는 건 그 순간 스데반 집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9편 19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라고 전쟁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길 간구합니다.
시편 3편 7절에서도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그 순간에 얼굴에 충만한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 일은 바울에게는 인상 깊은 사건입니다.
특히 악의로 가득 찬 바울의 얼굴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하늘문을 열고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스데반 집사에게 비치었던 것처럼, 동일한 일이 드디어 바울에게도 일어납니다.
다메섹 언덕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경험이 바울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이전에는 율법적인 열심과 혈통적인 자랑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 자랑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 임재의 빛을 경험하고 충만한 기쁨을 맛봅니다.
그의 기쁨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복음을 박해하던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매인 자 되었으나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빌 1:18, 2:17-18)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신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이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참된 의미와 기쁨을 부여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거룩한 일에 동참하도록 이끕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비할 수 없는 기쁨과 소망이 충만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어떠한 상황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드릴 수 있는 헌신은 무엇입니까? 제게 무엇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 거룩한 일에 주님은 우리를 동참시키십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며 기쁨으로 동참하면 됩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거룩한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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